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윌리엄 홀시 (문단 편집) == 평가 == [[레이테 만 해전]]에서 적의 기만전술에 말려든 일화[* 레이테에서 실수하게 된 원인은 [[진주만 공습]] 당시 공습에 참가한 항공모함 중 한 척인 [[즈이카쿠]] 때문이다. 그러나 홀시가 즈이카쿠가 미끼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갔다는 의견도 설득력이 있다. 홀시는 [[진주만 공습]]에 가담했던 즈이카쿠를 잡기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릴 성격이었기 때문. 실제로 레이테 만 해전 당시에 홀시가 저 행동을 저지른 원인이 즈이카쿠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다른 전대 역시 이것만은 인정했다. 심지어 저 당시, 정확히는 사마르 해전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77.43임무전대, 일명 '''태피3''' 마저도 후에 홀시로부터 "당시 즈이카쿠를 잡으러 갔고 결국 격침시키는데 성공했다."라는 해명을 듣고는 저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이 [[필리핀 해 해전]]에서 승장임에도 부하인 [[마크 미처]] 제독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이유 역시 즈이카쿠를 살려서 보냈다는 게 가장 컸다.]와 [[코브라(태풍)|태풍 크리]]가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실제론 상당한 기간 동안 기동부대를 이끌어온 베테랑[* 태평양 전쟁 초기부터 미드웨이 해전까지 기동부대를 지휘해 왔다.]이었으며 [[둘리틀 특공대]], [[산타크루즈 해전]], [[과달카날 해전]], 시부얀 해전, [[구레 군항 공습]] 등 다양한 전투에서 기동부대를 지휘한 지휘관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는 여러모로 [[레이먼드 스프루언스]]처럼 [[전장의 안개|유동적으로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불확실한 정보]]만으로도 [[전술|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인물]]이라기 보다는 [[전략|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한 자리]]나 오히려 [[체스터 니미츠|인간적인 면모로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자리]]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많다. 물론 고위 제독으로써 역량이 부족한 것은 아니기에[* "머리가 나쁘다"는 어니스트 킹 제독의 평가를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 킹 제독이 똑똑하다고 인정한 사람은 본인과 스프루언스 제독 둘 뿐이다. 그는 당시 미 해군 최고의 두뇌 중 하나였는데, 그만큼 성격도 괴팍해서 그 자신보다 판단력이 떨어지면 모조리 머리 나쁜 놈으로 취급했다.] 남태평양 해역군 사령관 재직 시절 수레바퀴 작전을 이끈 홀시는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줬는데. 흔히 알려져 있던 불같은 성미와는 전혀 다르게 전술,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와 그렇지 않는 곳을 잘 구분해서 전쟁 중기부터 미군이 벌인 개구리 뛰기의 초석이 된다. 이밖에도 홀시 제독의 전략적 식견이 돋보인 사례로 필리핀 탈환전이 있다. 미군은 원래 [[필리핀 해 해전]] 이후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에 1944년 12월 경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홀시는 필리핀 해 해전으로 일본군의 잔존 항공전력이 박살났음을 확신하고는 곧장 필리핀 남부가 아닌 중부(= 마닐라에 더 가까운)인 레이테 섬에 '''원래 계획보다 2개월 앞당긴''' 1944년 10월에 상륙하자는 과감한 제안을 했다. 필리핀 탈환전은 이 제안대로 따라갔고 미군은 일본군의 허를 찔러 전략적 기습을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덤으로 부랴부랴 결전장으로 뛰쳐 나온 연합함대의 잔존전력까지 분쇄하면서 일본해군에게 최후의 일격을 먹이기도 했다. ~~정작 홀시 본인이 그 결전장에서 체면을 구겼다는게 문제였지만~~ 또한 육군을 제외한 미군의 타 군종과 호주 같은 타국 군대를 깔보았던 맥아더 장군과 달리, 특유의 친화력을 잘 살린 지휘 덕분에 휘하 육군과 해병대 장성들과의 마찰이나 그의 구역에 있었던 동맹국인 뉴질랜드 군과 마찰도 없었고, 같은 해군의 [[마크 미처]] 제독과 [[http://en.wikipedia.org/wiki/Richmond_K._Turner|켈리 터너]] 제독 같은 실력 좋으면서도 성격이 정 반대인 제독들을 마찰 없이 지휘를 하며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나중엔 해군을 무시하던 맥아더 장군과도 거의 [[관포지교]]에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평생까임권으로 남은 레이테만 해전에서 오자와에게 낚인 일화도 홀시의 명백한 실책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기는 하다. 그도 그럴게, 홀시 뿐 아니라 미군 측은 오자와 함대가 대체 무슨 임무를 맡았기에 거기서 알짱대고 있었는지 '''종전까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노나카 이쿠지로 et.al, ''왜 일본 제국은 실패하였는가?'' : 태평양 전쟁에서 배우는 조직경영 중 2.5 레이테 해전:자기인식의 실패(서울:주영사, 2006-07-04) pp230] ~~잽스들이 주력함대의 '''전멸'''까지 상정하는 정신나간 계획을 작전이랍시고 들고올줄 누가 알았겠냐고~~ 물론 미군 측 입장에서는 오자와 함대가 뭐하러 온 건지 정확히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최소한 일본 항모가 함재기 전력이 필리핀해 해전에서 개발살 났고, 따라서 미군 항모 기동부대에 별 위협을 가할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자와의 항모를 끝장내러 쫓아간건 홀시가 내린 결정이고 따라서 홀시의 실책인건 분명하다. 다만 홀시가 항모를 쫓기로 한 이 결정도 레이테 섬 해전 직전에 있었던 필리핀 해 해전에서의 결과와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필리핀 해 해전에서 스프루언스 제독이 지휘하는 미 항모 기동부대는 일본의 항공모함을 전멸시키지는 못 했지만 일본의 함재기와 조종사에 치명타를 입히면서 일본 항모들을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실제로도 일본 항모부대는 이후로 두번다시 미군에게 함대 항공전을 시도하지 못한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스프루언스는 필리핀 해 해전 이후 일본 항모부대를 끝장 내지 못했다는 실망 섞인 불평을 들어야 했다. 단적인 예로 기동부대의 전단장 중 한명인 클라크 소장은 필리핀해 해전의 결과를 두고 백년에 한번 올만한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전쟁의 전체적인 진행과정을 고려하면 상륙중인 미육군을 엄호하는 것이 타당했다. 하지만 직전의 필리핀해 해전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빈 깡통이라곤 해도~~ 적 항공모함을 멀쩡히 냅둔 다는 것은 [[이건 못 참지|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전체적으로 명장이고 용장이긴 하지만, 감정적인 성격이 강한 데다 같이 싸운 동료 중 하나가 태평양 전쟁 불패의 명장 스프루언스 제독이고 레이테에서 적의 기만책에 속아넘어간 것이 큰데다, 태풍에 대한 오판으로 함대의 진로를 잘못 잡아서 800여 수병의 목숨을 태풍에 헌납한 일 등으로 인해 평가가 많이 깎인다. 당시 생존 장병중에는 홀시 제독의 5성 진급에 격분하는 사람이 현재까지도 다수 존재한다고 하며, 홀시 제독은 전후 각종 언론 프로그램에서 일련의 사건에 대해 자기 변호를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